문자가 왔다. 이번엔 75만원이다, 생동성 실험 아르바이트.


5 일이다. 분노와 반골 기질이 다분한, ’빔空’이 속에 많던 대학생 나는 많은 욕심에 비해 잘하는 것도 없고 꿈만 큰 놈이었다. 대단한 의식을 가지거나 운동권에 끼진 않았지만 언제나 주변에 있던 그런 사람. 집에서 살과 가계를 떼려고 노력하던 때도 이즈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고 싶은 것을 사기 위해 입대 전에는 해보지 않던 시간제 일자리나 단기 노동도 마다치 않았던 것도 이때쯤이다.


그런데도 돈이 소각되는 속도는 아르바이트 업체에서 종이가 들어오는 속도의 제곱 이상이었고 결국 돈이 나가고 욕망이 찼던 자리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것은 생동성 실험 전단지. 내가 본 것은 혈압약이었다.


최근 보도에는 지금 와 성행하는 듯 하지만 그 ‘몸쓰는 일자리’는 실은 내가 대학에 처음 발을 들일 때부터 많은 대학생의 ‘막장’이었다고 했다. 폐쇄된 병원에서 만난 박 형이 해준 말이다. (그의 성이 박朴가인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내 엄마의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박 형은 그날 실험 참여가 세 번째라고 했다. 피부약이나 혈압약, 관절약처럼 저마다 다른 부위에 대한 약 투약이기 때문에 보통 6개월 이후면 다른 실험에 참여할 수 있다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상상 이상, 또 다른 세계의 문이었다.


오리엔테이션, 신체검사를 거쳐 소집 날 병원에 도착하면 1층 문이 잠기고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던 그 공간, 나는 결국 “끝까지 갈 수 없겠다”고 밝히고 둘째 날 집으로 걸음을 옮겼지만, 여전히 흐린 날 A구를 지나는 지하철 안이면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천태만상의 지근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대단한 경험을 한 것도 아니지만 언젠가 이에 대한 글을 쓰리라 마음 먹은 상태, 아직 충분히 여물지 않았다. 여전히, 여전히.


흐린 날 그런 문자가 내 마음 가까운 곳에 도착했다. 천 년을 주기로 돌고 돌아 다시 마음에 당도한 운석처럼, 내일은 나도 모르는 마음을 잡고 A구를 다시 걸어볼까 한다. 차단해도 번호가 팔렸는지 돌고 도는 생동성 업체 연락처를 다시 지우고 나는 깊은 밤을 맞이하며. 여기는 서교동, 지금은 수요일. 은주 씨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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