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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리의 단면도 2014.07.23

오리의 단면도

from 소설, 이야기 2014. 7. 23. 12:20



물가를 따라 풀이 무성하다. 어떤 것은 옆으로만 자란다. 어떤 것은 두께도 두꺼워지지 못하고 위로 얼마 자라다 포기해버린다. 혹은 한계에 닿아 버린다. 어떤 녀석은 흐르는 물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피도 잡지 못하고 모가지가 제 멋대로 꺾인다. 저 건너편에서 흰 빛의 섬이 다가온다. 오리가 둥둥 떠 있다.

오리는 눈을 잘 감지 못하더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눈꺼풀인지도 알 수 없을만큼 툼벙했는데 나는 오히려 멋드러지게 날렵한 학이나 외가리보다 툼벙하고 멍청해보이는 녀석들이 좋더라. 그 오리를 같이 좋아해 주던 사람도 있었어. 물론, 연애감정을 떠오리려는 것은 아니야.

오리가 이 편 뭍으로 오르려 애를 쓴다. 이 쪽 각을 세운 돌들이 꽤 컸는지 쉽사리 오르지 못하더니 결국에는 날개를 위 아래로 부빈다. 암벽등반을 하듯이, 손 끝에 남은 힘을 쥐어 짜듯이 녀석이 뭍으로 오르다, 털썩. 물으로 고꾸라진다. 머리부터다. 고양이도 아닌 녀석이 무게중심을 잡아보려 허우적대다가 결국, 머리부터다. 물에 박고선 다시 오른다. 제 아무리 녀석이 오리라고 하더라도 부끄러웠을거야,라고 생각한다.

끝끝내 잡풀들을 밟은 녀석이 이제 풀숲을 뒤적거린다. 오디나 밀알같은 것을 찾는 줄 알았더니 한해살이 풀의 뿌리를씹어먹는다. 소화나 되려나, 싶은데 벌써 한 입 크게 물었다. 오리란 녀석이 먹성이 좋구나.

언제부턴가 모든 생물, 주로 동물에 대해 겁을 먹고 있었다. 녀석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속으로만 담고 담을 뿐이다.

영화같은 일들, 주인에게 애정표현을 언어의 모드만큼 적절하게 또 깊게 하는 몇몇 일들을 빼고는 녀석들은 눈에 담고 읽고 잊지 않던가. 그런 녀석들이 무서웠던 것이다. 내 많은 거짓들과 부끄러운 치부, 이를테면 연인이나 친구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순간이나 더 어린 시절의 치기로 친구를 미친 듯이 때렸을 때 혹은 더 심각하게 맞았던 순간들이 다 읽힐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끔 풀잎에게 상담도, 고양이에게 눈물도, 강물에게 침도 뱉지 않았나 싶다.

녀석들은 완벽해, 완벽했어.

난 이렇게 부끄럽고 부질 없는데.

그래서 나는 저 오리를 잡아 반으로 가르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두개골과 코와 목뼈를 따라 내려와 희디 흰 가슴의 정 중앙 선을 따라 항문에 이르기까지,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가르면 부끄러움들이 적어도 이 순간에는 흩어질까. 그것이 다시 무슨 몹쓸 짓이 되더라도 상관없을까. 이 순간에만 피할 수 있다면.

그럼 나는 오리의 단면을 보게 되겠지. 마음이 편할까, 그럼. 다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테야, 라고 오리가 말했다. 처음으로였다, 살기 위해서, 먹히지 않기 위해서 말고 그 툼벙한 눈이 하는 나즈막한 소리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다른 오리들의 소리가 들렸다. 다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테야. 다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테야. 다시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테야. 리듬있는 소리들에 나는 불규칙적으로 울음을 울었다.

살고 싶다. 잘 살고 싶다고 외쳤다.

나는 다시 규칙적인 소리의 세계를 걷고 있었다. 아니,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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