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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흑백필름, 오래된 암실의 기억 2011.07.24
나는 오래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기억은 낡은 빛,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빛은 색깔없는 빛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위에서부터 펼쳐진다. 빛은 명조와 채도를 모두가지고 있었지만 내 기억 한 편의 어떤 잔상에는 붉은 미등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로는 커녕 내 손이 내 손인지 발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색깔의 불빛 아래서 우리는 가로세로 재어봐야 손가락 한마디도 채 안될 법한 녀석을 뚫어져라 관찰했었다. 그레인이 너무 가늘어, 생각보다 콘트라스트가 깊지 못하네 따위의 말들이 아직 나오기도 전에 우리는 '신기해'나 '우주같은 세계다'는 섬세한 떨림을 잘게 더욱 잘게 쪼개고 있었다. 마치 이미 곱게 갈린 커피빈을 더욱 곱고 곱게 가는 저 섬세하고 아찔한 그라인딩 머신의 딱딱 맞아떨어지는 박자감에 맞춘 칼날질과 같이 말이다. 필름을 마운트에 꽂고 후지모토였던가 하지모토였던 이름의 영사기를 켜던 그 순간흐르던 놀라운 침묵, 이제와서 덧붙인 설명이지만 우리가 섬세하게 찍어내던 하나하나 그림같던 핸드메이드 필름 인화물들은 우리의 콧바람 따위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을 나는 기억한다. 그 침묵도 나를 기억할런지는 실은 조금 의문이지만 말이다.

덜컥하고 바트가 소리를 냈다. 처음 내가 찍은 사진을 감광액에서 투영해 올릴 때 선배는 조용한 말투로 내 뒤에서 말했었다. "천천히, 그리고 골고루 종이와 액이 닿도록 흔드는게 좋아. 차분하게 누른 셔터의 감각을 필름이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줘야하니까." 물론 나는 침묵하고 말았지만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며 몸을 뒤척일 때 나는 가끔 되내어 한 단어에 갖혀 헤매었던 것 같다. 기억, 그 앞의 '다시'에 대해서 말이다.

오래된 필름을 찾아보았다. 없었다.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잃지 않고 버렸는지 기억조차 없었고 '다시' 돌릴 수도 없이 사람들은 자랐고 시간들은 길었다. 물론 그 뿐이었다.

'다시'는 없었다. 다만 우리가 수세하고 버렸던 물 속에, 전시회를 펼쳤던 이 곳 저 곳에, 잊고 지냈던 카메라 셔터 위와 뷰파인더 안에, 필름을 넣으려고 힘있게 뽑았던 리와인더의 손잡이에 녀석은 숨쉬고 있었다. 찍었던 것은 흑백이었지만 사실 녀석은 총천연빛으로 가장하고 있었다.

다음 번 글에는 '물티슈'에 대해서 쓸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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