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뭉치를 정리하다가 마른 풀 냄새를 맡았다. 구유를 놓았던 자리가 아니고서야 맡기 힘든 이 자극에서 나는 오래 전 한 사람의 신경질을 느꼈다. 내 중심은 어디냐며, 네게 내가 어떤 사람이냐며 묻던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존재감 혹은 내 몸에서 그가 차지하는 무게가 몇 킬로그램이었냐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 그것 뿐이었다. 폴 세잔의 자화상 속 표정처럼 그는 가끔 표독스러움을 숨긴 채 나를 할퀴곤 했다. 내 가슴 속이 너잔해지는 것쯤은 견딜 수 있었다. 쓰러지는 순간에도 그를 바라볼 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꽃잎이 떨어졌다. 이른 봄의 사형을 집행하는 벗꽃의 투신에 그의 발바닥은 질척거렸을테고 내 감정은 물빠진 그것처럼 짓이겨졌다.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친한 친구를 맞이했다가 바빠지면 그를 신경쓰지 못하게 되는 때, 그 때가 그를 판가름할 수 없겠지만 피부 아래 촉점이 죽지 않는 이상 아쉬움이 있을것이다. 나 또한 그럴테니까. 하지만 그 자리를 그 자로만 매꿀 수 있다는 오만함, 그 하나만 뒤트를 수 있다면 이 또한 완연한 세월을 받아들일 수 있는, 멋대로의 방법 중 하나는 아니까하며 생각해본다.
그가 준 편지, 책, 밑줄, 지문 그리고 책갈피에다 '이 김훈같은 놈의' 라며 농을 쳐둔 쪽지까지 모아다 바구니에 담았다. 오늘같은 어제는 닫힌 페이지쪽으로 가로 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