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from 하루들의 합 2011. 12. 22. 11:26
칼날의 계절이 왔다. 비가 나긋나긋 내리다 오늘은 그쳤다. 이 비라는 녀석이 눈이 되는 순간은 순식간이지만 비에 비해 기억 속에 콕콕 박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가슴에도 상처를 조금씩 내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대리석을 아무리 동전으로 긁어도 상처는 나지 않지만 마음 속에 긁었던 흔적이 남는 것처럼, 그렇게 나에게도 자국이 남았으리라. 물론 이미 다 된 유기 혹은 토기에 금을 그어도 빗살무늬는 생기지 않겠지만 말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를 길이라 긋지 않았으나, 스쳐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으나, 지워가는 속도는 상상할 수 없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흘리기 위해 길을 걷는 것 같았다. 나도 그녀를 그 길 위에서 만났었지, 회상하며 길을 걸었다. 지워진 노래, 지워진 사진, 지워진 온도의 전철을 밟으며 오류가 많은 것이 내 인생뿐이겠느냐며 무의식을 안도케했다.

오래 전, 이를테면 벌써 4-5년 전의 일이다, 한 소녀를 알았고 잃었고, 잊었다. 그녀를 끄집어내 한탄의 글을 빚는 것은 내 인생에게는 사치다 싶어 김장독을 언 땅에 깊숙하게 묻듯이 묵혀두었건만 땅 땅 소리를 내며 독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그 마음도 내 마음이다 싶어 잊어 부정함을 포기하기로 했다. 내가 나를 안지 않으면 그 누가 나처럼 나를 안아줄까 싶어 깨달은 바이기도 한데 이는 모두를 걸었건만 버림받아본 남자라면 공감할 수 있으리라 본다.

대뜸 이런 시간들의 최대공약수는 무엇일까 되내보았다. 겨우 50cc 스쿠터의 속도에도 눈물은 떨어지지 않게 눈 위아래로 보석처럼 쏙쏙박힘을 알고 이런 녀석도 쓸만하구나, 하고 생각할 때쯤 내가 간과한 것은, 마치 내가 모든 정황과 사실을 알았던 것 마냥 행동하던, 모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거리가 나를 잡아 끌고 있다. 이건 마치 늪인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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