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하지만, 또 죄송하지만 굼뜬 질문이지만 세상은 불평등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성질이 나진 않는다. 고백을 하나 하자면 실은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 열량을 태우고 땀을 가끔 흘리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운동을 거의 하지 않다가 못이겨 몸을 겨우 조금 움직이는 친구가 나보다 몇 배나 더 빠르게 달리거나 무거운 것을 들 때, 실은 나는 부러워 하기보다 억지에 무리를 더해 이기거나 따라잡아보려고 했다. 물론 쉽지 않았기에 발전했다. 그러나 앞지르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그 간격은 쉴 새 없이 벌어져 그만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운동력뿐이랴.


태어날 때부터 어떤 면으로 머리가 발달하거나,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몸에 색소가 없는 이도 있다. 사실 세상은 가끔 그보다 더 지독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하는데 장애인 권리에 대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겉으로 보면 장애인 권리에 대한 것은 계속 신장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진실된 것일까. 그들이 불편하지 않을만큼 편하게 해줬는가. 그 편안 속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소통되었는가. 아니면 그 모든 자체가 필요불충분한 것은 아니었을까.


예를 들어보자. 나는 팔이 하나 없이 태어났다, 정말 그렇게 태어나신 분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논리적 가설이나 합리적 상상을 통한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 보아 주시라. 그렇다면 나를 위해 한 팔이 막힌 옷을 만들어주는 것이 합리적인가. 아니면 한쪽 팔을 의완義腕으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이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은 것일까. 그도 아니면 그가 그저 남들과 똑같이 거리를 활보할 때 한 쪽 팔을 흔들지 않더라도 신기해하거나 인식하지 않는 것이 명쾌한 답일까.


답은 없다는 것, 그것은 답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답을 찾는 것, 그것 역시 답을 얻고자 답만 찾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적어도 내 생각.


예와 같이, 우리는 기본적으로 '아주 명료하게' 모두 불평등하다. 더욱이 모두 불완전하다. 슬프게도 '개천에서 용난다'가 아니라 '개천에서 어쩌다 용의 새끼가 났는데, 생각보다 용의 새끼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 우연히 갖춰져 용이 된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착각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이 된 거다.


그럼 이 불평등을 어떻게 타개해 갈 것인지, 실은 대학 진학율 98%에 빛나는 대한민국 청-초중년은 알아보고, 알아가야 할 지식인으로서의 의무가 있다. 대학이 아무리 통과의례로 변질되고 또 하나의 스펙이 된다던지 인맥과 연애의 장이 될지라도 말이다.


주저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중간 논리가 꽤 생략되긴 했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당신들은 앨리트다. 똑똑히 들어라. 사회를 정의롭고 올바로 볼 수 있도록 함께 이끌어 가야 할, 월급이 오르건 내리건, 누가 사장으로 다시 부임하건 말건, 끝끝내 시대의 소리를 책임져야 할 앨리트다. 이게 지금까지의 뻔한 앨리뜨 주의와 같은 맥락이 아님은, 내 진심이 진심임을 안다면 알 것이다.


추신, 지금 당장 몸에 불지르듯 아스팔트로 나서서 혼자 산화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가 내 사회고 또한 우리의 사회라 믿는다면 언제나 격언처럼, 언제나 마음 속에 되새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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