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밖에 없는 동생은, 가끔씩 내 글은 허세라 했다. 나는, 그럼 세상의 어떤 글이 허세가 아니냐, 고 말하려다 참았다. 괜한 싸움 만드는 것은 필요없는 행동들이니까 말이다. 그 치는 진심은 있는데 진실은 없어 보인댔다. 있는 그대로를 쓰는 것 쉽지 않다. '굳이' 쓰자면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얼만큼의 파장으로 울릴지 알 수 없으며 나 또한 소심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싶어하니 적정을 지키기 어려워서. 그래서 최대한 묘사보다는 상징, 자연스러운 표현보다는 나대로의 공기소묘를 벌이곤 했던 것이다.
오래 전 만났던 어떤 친구는 장문의 문자를 보내고 관계를 와해시키는 전화를 건 적 있었다. 전화벨이 울릴 때, 그의 전화번호가 내 창에 뜰 때, 받지 않으면 '관계라도 서로 아름답고 귀하게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전화를 받았다. 내가 쓴 어떤 글의 어느 구절에서 자신과의 대화가 떠오른다며, 기분이 편치 않다고, 했다. 되물었지, 어떻게 해줘야 하냐고. 그 구절 때문에 그 글을 내리기에는 옹졸한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며 그럴 바에는 블로그를 닫거나 주소를 바꾸겠다는 이야기를 되돌려 주려다, 침묵으로 답변했다. 그리고 그가 최후로 던진 말은 '고맙다'는 언급이었다. 좋은 의미였을까, 아니면 그 정반대였을까. 그 후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인생은 교차로라서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떠나보낼 순간은 언제라도 불현듯 찾아오며 관계 속의 호불호는 순차적으로 올 것이며 이것들이 발라드처럼 서서히 강박처럼 오거나 힙합의 펀치라인이나 플로우처럼 계속 우리를 들쑤시기도 한다는 것. 내 방식에 맞지 않는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좋은 영향으로 섞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이것을 긍정의 마음이라 부르는 것은 과대망상일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는 무조건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나는 집에서 아직도 꾸러기이기만 하다. 호불호와 무관한 사람들. 그리고 호불호의 취향 그 위에 서 있는 인류, 그리고 뿌리에 대한 스트레스는 '꺼야꺼야 잘할꺼야'를 보던 오랜 과거나 투마더스Adore, 뫼비우스(김기덕)같은 영화를 아무렇지 않게 보는 현재나 같다. 종국에서라도 적응되어야 하는 부분을 나는 사회의 시작이라 여기기로 했다. 쉽게 말해, '도道를 지키는 아들' 정도로는 보여야겠다는 것.
3.
지금은 고향을 떠난다. 곡식이 여문 저 감사한 들판을 느낄 새 없이 다시 터널로 들어가는 걸음은, 그 오랜 시간을 오랜만에 쉬었음에도 슬퍼온다. 나를 나대로 발휘치 못하는 공간이었다. 내 말투는 누군가의 스트레스, 어떤 이들에게의 겸손, 혹은 거짓, 엄마의 잔소리거리 아니면 바닷가에 한번 가보지 못한 바닷가 출신 도시 청년의 조그만 도약은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었을테니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인과만을 생각해서 살기 싫다. 그러나 확고함은 언젠가는 필요한 소양. 그 어떤 능력보다 나에게 필요한 것.
4.
비밀이야기 하나 하자면, 블로그 말고도 글은 많이 씁니다. 한 줄 던질 때도 있고 원고지 수 십, 수 백 장만큼 쓸 때도 있고. 그 모든 생각의 가장 아래에는 '순례자'와 '구도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깔려 있습니다. 회사원, 누군가의 아들, 글을 쓰거나 목소리를 내는 일 혹은 영향력을 미치기 이전에 '나의 존재'로서 '세상의 품'에 있거나 '세상과 경쟁, 시체말로 맞다이' 하거나 하등, 동등, 선진의 위치에 있는 여러 순간들에 대한 모든 욕심은 바로 이런 동경에서부터 나올 것입니다. 완성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완성될 수 없는 그 모든 순간들이라도 알아가고 싶은 조그만 소망 정도일테니까요.
5.
그러니 오늘도 그가 그립습니다. 아주 오랜 그 시간 동안 사랑했고 사랑해 온, 같은 태양 아래의 그. 들판에 바람이 불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잡초라 해도 우리는 감사해야 할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