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악이다. 악은 악으로서 존재한다. 선은 악을 만들었다. 선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돋보일 수 없기에 악을 만들었다. 만약 악이 존재하지 않고 강한 선과 보통의 선, 미약한 선만이 존재했다면 우리에게는 고통따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원의 어떤 종교의 지도자나 신, 메시아도 악 없지 않았다. 그들은 악을 구원하거나 퇴치, 혹은 구제하거나 악의 존재를 알려줌으로서 선과 악의 경계 위에 있는 존재로 승격될 수 있었다. 명백한 사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묻겠다. 과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악한 것인가.
존재와 행위 혹은 실체라 불리우는 것들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예컨데 유영철은 어린 시절, 불후한 가정환경을 자신의 과오(라 그는 인지한 것 같았다.)를 낳았다고 했으며 이 밖의 사이코패스 증상 외의 죄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곤 했다. 종국에는 종교나 기댈 곳을 찾기도 했고, 나는 이런 모습에서 인간의 최후적 나약함을 발견하기도 했다. 포이에르바하에 의한 이론(쉽게 말하면, 종교는 인간 의식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신의 존재와는 별개인 것으로 본다, 나는.)에 강한 관심이 있는 나는 인간의 인지와 행동 사이에도 많은 오류들이 존재한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수천겹의 세포에 둘러쌓여 벗겨짐을 반복하며 한없이 투명해지는 양파의 표피와 유사하다고 봤다. 에고, 슈퍼에고, 이드는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다른 가닥으로 생각을 뿜어보면, 나는 수많은 순간들에 소극적이었다. 내 표현에 적극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한겹 아래 감정이 뿜어내는 반작용의 과도한 모션을 생각하진 못했으리라. 연애도, 교우관계도, 엄마나 동생에 대한 표현도 (물론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에 대한 표현은 그 외의 것이다. 나 자체가 상식에 맞지 않을 정도로 그건 강력한 감정이긴 하다. 1Q84의 주인공이 유년기에, 기억조차 나지 않을 시기에 형성된 '엄마와 다른 남자의 섹스에 대한 환상'처럼 강렬하게 나를 존재하게 하는 힘일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소극적. 그러나 마음의 크기가 돈독한 것을 아는 사람들에겐 이것은 나와의 강력한 끈이 되기도 했다.
극도의 소극적 행태를 보이면서 나는 이 원인에 대해 궁금해졌다. 나를 탐구하는 작업은 내가 받았던 충격들에 대한 회귀로 이어지곤 했다. 괴짜같고 천재같았던 초등학교 시절, 억지와 자의의 뒤범벅으로 공부에 몰입했던 중학교 시절, 따돌림과 몰입에 매몰되곤 했던 고교시절을 지나 자의식이 곧추섰던 대학시절 전반기와 가면 안의 군대 생활까지. 생을 걸만한 고난이 없어보였지만, 있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가엾은 내 옛모습들.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내 모습도 가엾어졌다. 지나온 나는 이미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닌 것. 일관된 나의 고집이었던 것이다.
상처받는 것은 싫었다. 죽기보다 싫었다. 차라리 매정하고 말았다. 단호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쉽게 그러지도 못했던 순간이 많았고 또 다시 갈등이 오곤 했다. 그래서 요즘은 상처받는 연습을 하고 있다. 말 한마디가 가슴에서 등골까지 쑤욱하고 들어와도 최대한 담담한 척 하려 노력 중이다. 마데카솔 분말같은 치유들을 원한다. 1970년 처음 생산된 마데카솔은 동남 아시아에서 자라는 식물 센테야 아시아티카를 원료로 삼고 있다. 동물의 살갖을 다스리는 것이 우리 나라에는 재배조차 되지도 않는 식물이라니. 아이러니할 것 같지만 세상은 비슷한 사람이 아닌 자들도 합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는 것, 전혀 다른 곳에서 찾는 현답이라 간절히 믿어본다.
악은 악이다. 다수결에 의해 만들어진 악은 '기어코' 악이다. 그렇다면 소수결은 어떠할까. 일본 만화 원작의 라이어게임에서 나온 소수결은 의외의 경향성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세상에 두가지, 성선과 성악만 있다면 나는 긍정의 힘을 믿는 편이다. 단호한 마음으로 '오늘의 나'와 '오늘의 우리(들)'를 믿어본다. 악한 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