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마라톤 풀코스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쇼츠와 하프셔츠를 준비했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것이다. 그냥, 그냥 신청했다. 앞이 막막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올 수도 없던 날들을 탑쌓듯 공들여 지내다가, 할 것은 달리는 것 밖에 없었다. 녹록치 않은 다리와 나약한 정신으로 과연 결승선을 밟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보다는 나를 믿고 지켜보고, 먼저 삶을 가는 분들을 따라 걷는다, 생각하며 달려보기로 했다.


사실, 풀코스를 신청해서, 이 달리기를 기점으로는 '저, 이제 다시 건강해요. 마음도 그대로구요. 조금은 더 성숙했고 세상의 여러 맛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됐어요. 우리, 더 나누고 등 기대고 살아요.'라고 말하며 성찰의 꿀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건 허영이었다.


나는 더 엄한 유리벽을 쌓았다. 사람들이 흐른다. 물처럼 만났다가 얼음처럼 갈라서고 다시 수증기처럼 제 멋대로 떨어져 무안의 사이가 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유리벽을 넘지 못한다. H는 내 꼴을 보고 거의 울기 직전까지 갔고 동생 C는 알지 못하는 나의 내면에다 꽃을 주었다. 친절하지만은 않지만 서로 믿고 따르는 K는 나에게 영육 간의 빵을, 또 다른 작가 선배 K는 힐링의 혀를 나에게 띄웠다. 얼음의 녹는 점은 영 도인데 얼음벽의 녹는 온도는 몇 도일까. 어제는 보이스 코리아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한 남자, 한 여자, 한 남자, 한 여자의 노래들을 듣고 보다가 S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이젠 모두 끝인가요. 그런가요. 우리 약속했던 많은 날들은' 으로 진행되는 가사의 끝에서 근래 가장 큰 울음이 터졌다. 그녀는 간절했다. 이어서 터진 백지영 씨의 말 또한 다시 한번 나를 울렸다. "나는 스물 셋에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나도, 였다. 나는 스물 일곱의 나이에 어떻게 오늘을 버리고 있는가.





어디엔가 처음으로 고백하건데, 나는 삶을 잃기를 시도한 적 있었다, 두 번. 그 처음은 중학교 3학년 때였고, 물론 어린 치기일 수도 있을테지, 또 한번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시험도, 연애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교우 관계도, 베르테르 효과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의 붕괴 때문이었다. 나처럼 쉽게 사람을 믿는 사람은,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을 얻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믿었던 사람의 실망은, 물론 나의 욕심도 더불었다고 자위해보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 또한 동일선상으로 밀어버리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정말 믿었던 친구 녀석이 다른 곳에서 '황선진은 개새끼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는 없다'고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 일이 실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사한 일들의 접촉 속에서 나는 나 자신 조차 믿을 수 없게 되었었으니까.





나는 그냥 있는대로 글을 뱉어버리는 데 익숙해서 이렇게 적고 있지만, 어쩌면 어떤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우리가 삶에 스스로 약속한 많은 것들을 잃고, 이제 모두 끝이라 하여도, 끝이 시작임을 기억하자. 당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무례했던 시간들을 훌훌 내려놓고, 이제 나는 어떤 종교도 아닌 긍정의 힘에 한표를 결승선에 던지러 간다. 내일은, 즐겁게 달릴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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