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나 무너짐과 재건축의 반복이지만.
역겹게도 구토가 시작되었다. 어떤 구토들은 때로 아름답다. 물론, 이제 아기를 담은 어린 어미의 헛구역질이나 이별치사당한 친구의 눈물 섞인 울음 구역질, 저 옛날 (혹은 상상 속에서) 예수를 업고 강을 건넌 거인의 그것까지, 굳이 어떤 경우를 한정짓지 않더라도 구토는 더럽지만은 않았다. 나의 오늘 구토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구토였을까.
가까운 과거에, 서글펐던 하루가 떠올랐다. 나와 J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무엇을 사먹으러 가거나 옷을 다리거나, 여가를 즐기거나 일을 할 때도 언제나 붙어있는 벗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를 바라며 협박이라 언급되질 못한 협박을 가했을 때, 그러면서 슬라이트로 된 벽을 쾅하고 쳤을 때, 덜컥거리는 벽과 내 안경과 또 내 마음은 억지로 하복부를 밀어올려 토사물을 만들었다. 술을 진탕 취하도록 마셔도, 목 끝까지 음식을 채워넣어도 한번도 없었던 그 사건이 집에서 천리나 떨어진 강원도 화천에서 일어났을 때 나의 구토는 시작되었다.
이 후론 구토는 언제나 자유로웠다. J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전역 이후로 나는 언제나 원하는 떄에 원하는 양의 구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술을 마시고, 물론 요즘은 술을 끊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사라졌지만, 정신이 없어질 듯 한 순간이 오면 스스로 일어나 화장실이나 골목에서 토악질을 시도하기도 했고 음식을 잘 못 먹어 속병이 도질 것 같으면 알아서 일어나 치유하기도 했다.
내 몸이여서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었다.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정신적 구토감이 바로 그것이었다.
소위 '토 나오는 영화'들은 많다. 그런 것들은 주로 시체나 사건, 혐오스러운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었다. 굳이 그런 류의 매체를 좋아하진 않지만 또한 가리지 않는 나로서는 가끔씩 지뢰처럼 터지는 그런 영화나 소설들에서 포비아적 감정을 소멸시키려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다양성의 인정'을 모토로 삼는 나는, 그래서 게이나 레즈비언, 이상성애자나 연애 환승, 혼전성교나 혼후순결같은 성적 카테고리나 나치주의자, 나치포비아, 모계사회, 사대주의적 사고나 전쟁광 등 반보편적 문화 요소에 대해서도 관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내가 만든 것일 뿐이라는 것. 오늘도 느끼고 말아버린 것이다.
커피하우스에 앉아 S가 쓴 소설을 읽고 있었다. 연애소설이었다. 꾸준한 글쓰기 이후 단단해진 기반과 시대적 배경을 안은 그는 많은 베스트 셀러를 썼다. 그렇다고 읽기에 쉽거나 한 소설은 아니었지만 써내는 책마다의 독자층 합집합을 바탕으로 최근 써낸 소설들은 대부분 큰 호응을 내고 있었다.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나는, 그의 초기작들을 읽는 중이었다. 짧은 문장으로 단단하게 엮은 그의 말들은 얼기가 촘촘한 그물같았고 온점과 반점으로 조화를 이룬 강조들은 총알이 되어 내 가슴팍에 팍팍 박히고 있었다. 연.애.가.무.엇.일.까. 산다는 것에서 계속 따라오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과연 사랑과 연애는 언제나 교집합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읽음 끝의 길고 깊은 생각들 사이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L을 보았다.
L을 만나기로 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를 만날 생각이 없었다. 인간 대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주고받을 포틀레치가 있는데 그걸 잃어버리면 나는 그 인간관계는 끊어버렸다. 그만큼 그것(포틀레치)은 (나에게) 중요했다. 그리고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 던져버려도 다시 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잘 붙어있기도 했고 때로는 이름을 바꿔 인생의 역사 속에 켜켜이 숨어있기도 했기 때문에 아예 떨어져 버린다는 것은 가끔은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했다. 역사 속에 많은 이들이 이를 잃고 자살하기도 했으며 칼부림을 부르기도 했다. 그런 귀중한 포틀레치를 냉혹하게 버린 것이 L이었기에 오랜 시간 끝에 찰나의 곁눈질로 만난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어떤 해괴함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껴버린 것이었다.
L과 나는 좋은 관계였다. 서로의 활동을 존중해주며 북돋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애정결핍을 치료하는 대가로 나는 재물이 되어야 했던가. 나는 왜 나를 짜내야했던가.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나는 악령이, 이 서울 어디엔가 떠돌고 있다는 잡념을 가져야 하는가. (이럴 때는 내 기억력이 정말 못마땅하다.)
찬 바람을 맞으러 밖으로 뛰쳐 나왔다. 매스꺼움은 계속됐다. 영화 '안티 크라이스트'가 떠올랐다. 주인공인 부부는 각자의 성기를 상해한다. 너덜너덜해진 음경과 잘려진 클립토리스는 오염되어 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기억 속에 구토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잘려진 그것들을 삼키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평소에 즐기지 않는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그리고 추가된 생크림과 샷. S의 글과 나의 기억과 L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많은 포틀레치들마저 구토로 오염되어, 나는 스스로도 모르게 이 성스로운 커피로 구토를 정화시키려 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