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찬 바람의 날, 어둠보다 비가 더 어두웠었지


비가 온다. 회색과 코발트 블루의 중간빛깔의 하늘에서 초록비가 뚝뚝 떨어진다. 창문 가까이 고개를 기대보았다. 겨우 4층 높이에서, 그런데도 사람들의 우산은 점처럼 조그맣다. 점들이 흐른다. 평소라면 무채색의 정장들이 갈라졌다 모였다를 반복했을 충무로 사거리에 어느덧 적막이 깔렸다. 이 무드는 사실 나만의 것이었으며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그녀가 나타났다.


여전히 웃고 있다. 끝끝내 하드보일드하기만 했던 나를 바라보며, 아니 생각해보니 그건 내 눈이 아니라 콧잔등이거나 인중이었을 수도 있지만, 조용히 미소를 흘렸다. 그 날도 조금의 비가 흩내렸었지. 잠시 내뱉은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에 나는 의자 위에 앉힌 의자가 된듯 그냥 묵묵함만을 내비쳤었어. 그리고 호수, 넓은 끝자락 반대편에서 거위인지 오리인지 아니면 고매한 학이거나 초라한 외가리인지 모를 녀석의 울부짖는 소릴 들었다. 함께, 가로등이 속도를 맞추어 울음을 뱉는 시간까지 그렇게, 너는, 미소만.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시간과 나와 내 판단력들, 그리고 같은 것은 주머니 사정과 허풍과 과묵함, 부끄러움. 언젠가부터 도서관이 가깝지 않게 느껴졌던 것은 그 안에 있는 책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공기들, 푹 삭은 곰팡이들과 사서가 끌고다니는, 도르르 소리가 나는, 원목으로 짠 서가별 정리용 수레와 창가에 딱 붙여서 만들어진 임시독서대들마저 내게 '니가 니 맞나'하고 발음마다 조각내 소리칠까봐서 그런 것, 인정하긴 싫지만 그래 그 기분도 맞다.


참, 그날도 오늘도 나는 우산이 없다. 비맞는 것도 비를 피하는 것도 잘 못하는 나이기에 비를 함께 맞거나 비를 대신 맞아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기심일지도. 그래도, 또 그렇게 나는 비오는 날에 기억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좋아진다. 상대적으론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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