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날씨처럼, 청춘은 덥고 맑고 쓰다.
2.
오랜 영화같은, 은교를 보았다. 소설에서 읽지 못한 돈의 맛과 자잘한 풍경도 함께 읽었다. 그리고 온전한 슬픔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다시 안도했다. 버릴 안목이 많이 남았음에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에, 은교를 보았을 때 울컥한 마음에 대해 무릎이 탁 풀리는 순간을 (열이 나게) 겪고서 나는 슬픔을 발견했다. 그래, 소설에선 느끼지 못한 한 줌의 아련함을 느꼈다.
적요는 은교를 가지려 했지만 잘 마음따위 있지 않았으리라. 소설과 다르게 덜 미화되고 더 현실적인 화상에서조차 그는 은교에게 성기性器를 꺼내놓지 않았다. 어린 소녀에게 그것은, 물론 도덕률로 제한된 우리나라의 경계 안에서 보더라도,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성文聲이라 '보여지는' 그의 역사와 먼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은교의 생기를 사랑했다. 살복숭아같은 엉덩이와 무화과같은 풋풋함, 막 수확한 옥수수의 머리채같은 수수한 머릿결까지 그에게 그녀(은교)는 '젊은 문학' 그 자체였다. 혹여나 은교가 마음을 못되게 먹더라도 그가 제어했으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깨져버리고 적요에게, 은교에 대한 사랑은 추억이자 그리움으로 남아버렸다. 그것은 은교의 사랑도, 이별도 아니오 그 자신이 가진 마음의 동요도 아닌 지우의 '적요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지우는 적요를 사랑했다. 그의 문학과 재능과 촉을 사랑했다. 사랑은 변한다. 언제든 쉽게 움직이곤 한다. 그러나 지우의 적요는 신과 같았으며 변치않고 언제나 물을 주는 사철고로쇠같았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인간에겐 원초적인 욕망이 있다. 그는 공工에서 문文으로 전환하며, 그보다 어릴적 파랗게 밀어버린 촉들을 살리(고파)려 했으나 살리(우)지 못했다, 아주 일부분밖에는. 규정되지 않은 섬세는 언뜻언뜻밖에 그를 날게 하지 못해 '정복하지 못할 세계'에 닿지 못했으며 그 모든 욕구불만은 결국 세계로의 도피, 예를 들어 '은교출간'같은,와 맞닿으며 가장 사회적 존재로 각인되어 간다. 그의 딱딱함이 그녀의 따뜻함에 닿을 때 조차 그에게 성스로운 성은 '그의 길' 위에 있지 못했다.
은교는 외로웠겠지, 그리고 고왔다. 딱 그 나이의 소녀, 그만큼의 가슴크기와 그만큼의 눈물 그만큼의 제한능력을 가졌었다. 그녀의 다리는, 그러니까 광고에 나왔던 유혹의 눈빛을 포함한, 적요에게의 에로스를 상징하지 않았고 비에 맞은 등덜미와 교복은 외로움도 함께 젖었었으니. 그리고 어쩌면 그 외로운 수증기들을 적요에게 가져다 준 '전이'의 시작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녀는 그(들)의 세계에 와서 '연필이 필통을 조근조근히 울리듯' 마음을 울렸다. 은교가 흔든 필통이, 마지막 장면의 적요의 눈물과 결국 닿을 줄이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교에 대한 또하나는, 결국 사랑은 분류될 수 없다는 것. 에로스와 플라토닉, 루두스와 스트로게는 형이상의 세계 속에서 둥실 떠다닌다는 것이다. 물과 기름이 다르다 하여 쉽게 섞인 그 막을 '칼처럼' 도려낼 수 없듯이 미묘한 감각들이 그들의 막 사이에 존재했다. 윤리의 틀을 위해 그 사랑을 '사랑이 아니다'고 말하긴 싫다.
3.
나는 굳이 사람을 글을 음악을 감각을 분류하려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은 마치 에어컨에서 바람이 나오면 외부기에서는 무채색 바람개비가 돌기 시작하듯 마음이 (영화 말미의) '은교스러워져' 가만히 그 사각의 심장(외부기)을 쳐다보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