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잊지 못할 울음의 순간>
오래갈 것 같다, 나의 많은 생각은. 그래도 나는 살아있고 살고있고 살아야하며 살 것이다. 사는 것이 구역질나고 살기 싫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눈물 콧물 억울한 생각 다 참고 끈덕지게 살 것이다. 그게 나의 도리고 길이다.
그냥 눈물이 막 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없었다. 날이 이렇게나 맑은데, 그렇게 빌고 빌었던 순간은 오질 않았다. 나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옆에 계시질 않았다. 그 순간이 도래하기까지 딱 찰나가 걸렸다. 영영 다시는 오지 않을 가장 비싼 시간이 나를 지나친다. 받지 못한 전화와 뜨지 못하게 부어버린 눈, 예비군 훈련을 빼먹으면서 한참을 처박은 고개까지 어떤 것도 가치롭지 못하며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들에게 환원불가능한 시간이 되리라.
할아버지는 지금 고 우재근 상병과 고 김난수 상병의 사이에 조용한 침묵으로 계신다. 왼쪽 편에선 제사를 지내고 오른 편에선 개신교식 기도상을 차려놓았다. 우리집은 거추장스러운 도구 하나 없이 기도서 두 권과 성수 반 병만을 가져와 목비를 둘러쌌다. 실은 내가 성당엘 잘 나가지 않는 것, 엄마만 알고 있었다. 신과 종교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게으름도 그에 대한 단단한 한 몫을 하는 것, 엄마는 알고 있을 터였지만 굳이 아무 말도 하진 않으셨다. 그래도 오늘은 더 열심히 기도를 했다. 악을 쓰고 싶은 걸, 더 크게 소리를 내 할아버지께 들리게 하고 싶은 걸 참았다. 참은 분함 때문인지 그냥 내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눈물이 계속, 계속 났다. 나뿐만이 아니였을 것이다. 베르테르 증후군이 무엇인지, 굳이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람의 나약한 마음은 여러 소리를 내는 가운데 깊은 곳의 소리가 조용히 쿵쿵 울리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 묻히신 땅은 참으로 고요하고 어려운 적막이 흘렀다. 낮 한 시가 되면 언제나 시작되는 영결식 소리에 편안히 잠드실지, 고향을 떠나 먼 그 곳 대전에서 다시 영원이라 불릴 시간들을 견뎌낼 일에 존경을 표하기도 전에, 세워진 목비를 쓰다듬으면 마치 자동눈물스위치를 누른 듯 눈물, 콧물, 서러움이 형언불가케 쏟아져내렸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이제는 편안해야한다고,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속삭였다. 햇볕이 내려쬐는데 땅이 너무 찼다. 틀도 너무 찼다. 목비도 그 위에 임시로 프린트해 세겨놓은 할아버지의 이름도 그리고 그 단지, 단지를 싸고있던 보자기까지 너무나, 너무나.
영락공원의 화장장 4번 화로의 불이 꺼졌다. 곧 강철의 밸트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듯 모든 것이 사라져 잔해만 남은 판이 우리의 눈 앞에, 얇은 유리를 두고 내려왔다. 기골이 장대한 사람은 정강이, 허리, 머리의 뼈가 통째로 남는다 했다. 우리 할아버지의 유골은 나올 때부터 바스라져 있었다. 두명의 수습인부가 제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한 명은 커다란 자석을 들고 몸 안에 있던 수술자국(쇠붙이)들을 훑었고 다른 한 명은 마스크를 푹 눌러쓰고서 쇠쓰레받이로 유골을 쓸어내렸다. 할머니가 뒤로 돌아서셨다. 할머니는 "오빠, 맹주아빠, 오빠, 나 이제 진짜 혼자요. 좀만 기다리시요이." 하셨다. 눈물이 났다. 눈물이, 화장실에서 수습 및 영안실에서 많이 흘려 마른 샘 그 안 쪽에서 눈물이 났다.
검은 옷에 새하얀 셔츠를 입고서 부의함을 지켰다. 사흘, 기껏해야 쉰 시간 동안 삼촌은 수백번의 절을 했다, 한번도 실수하지 않는 자세로. 또 엄마와 나와 동생은 계속 음식을 날랐다. 아빠와 삼촌의 회사(GS 칼텍스)에서 상을 도와주는 분들이 나와 '쉬라'고 했지만 쉬기 싫었다. 내가 쉬는게 욕되어서가 아니었다. 내 몸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덕분에 수육을 그렇게 먹는게, 부산에서 너무 너무 생각나서 딱 세 점만 먹었으면 했던 홍어를 이렇게 편하게 먹는게, '피곤할 때 돈이 많다면 언젠가는 저 비싼 것 두어병씩 마실테다.'고 생각만 하던 자양강장제를 두세병씩 마시는게 편치 않은 이유 또한 아니었다. 막연한 기대나 의심없는 행동, 내가 시킨 나의 몸은 아니었기에. 그래, 나는 그랬다.
동생이 나에게 '오빠, 2시까지 5분만 기다려달라고 하면 안될까?', '제발, 나 석창사거리야.', '진짜, 제발' 문자를 여러 통 보냈다. 결국 동생이 도착한 시간은 2시 5분. "내 편지는 어떻게 해. 이거 드리려고, 이거라도 드리려고." 동생은 힘없는 내리막길을 뛰어내려와 엄마를 붙잡고 그렇게 힘없이 울었다.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2012년 5월 3일 오후 6시 25분, 할아버지께서 숨을 내뱉으셨다. 그리고 다시 들이키시지 않았다. 신이 어디있는가. 있다면 너는 개새끼라고,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녀석이라면서 나이를 어디로 먹었냐고, 다시 물어내라 매달린 마음을 스스로 껴안기에 벅찼던 이유는 그의 영면의 낯이 고요했기 때문이었다. 찬 손을 만질 때, 끝끝내 힘없는 손으로 쥔 묵주에는 어떤 생각이 가득했을까. 염과 습, 소렴의 시간이 지날 때 내가 손에 힘을 하나낼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목 또한 내 손에 어떤 힘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기를 쥐면 아는 새 없이 빠져나가듯 그저 그런 세기만 내 체온에 박힌 듯 했다. 관은 너무나도 찼고 너무나도 찼고 너무나 시려서 영화 속에서 나오는 '시체의 살아남'은 그저 영화임을 알 수 있었다. 대마로 된 할아버지의 마지막 옷자락 안에서 오른쪽 팔꿈치의 한지가 북-하고 찢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샐 것이다. 되잡을 수 없이 오랜 시간 동안이 아니었으면 했다.
여수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을 향했다. 할아버지는 없었다. 병실로 들어가고 싶었다. 차라리 많이 아프시길, 아주 잠시 바랐다. 병원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 내가 읽은 것이 장례식장이라는 한문이 아니길 바랐다. 목포, 광양, 서울, 인천. 멀리사는 이모와 친척들을 만나는 자리가 아니길 바랐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가 그렇게 쉽게 포옹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장면을, 나는 편하게 목격하기를 바랐다. 나이든 할머니들, 배타고 섬에서 나온 이들, 몸도 성치 않는 분들이 밤을 새워 이불도 없는 곳에서 주무시는 광경이 이렇게 빨리 당도하길 나는 단 한번도 바란 적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사랑했고, 실은 미워한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2-3학년, 지금 생각하면 나쯤은 그저 '어장관리되는 녀석 251호' 정도로 생각되는 친구들이 몇 있던 시절, 할아버지가 만든 상처, 그러니까 내가 일곱살 무렵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다고 떼를 쓰며 백원 내놓으라고 칭얼댈 때 그만 좀 하라시면서 이마를 찰-싹 떼리며 손톱으로 죽- 그은 자국에 오래 그리고 깊이 남은 자국 때문에 '이 것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못하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에도 할아버지는 나의 우상이었다. 언제나 단단하셨고 곧았으며 소식하셨고 정갈하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할아버지와 엄마의 성은 모두 나와 다른 '박' 씨지만 세상에는 다름만으로 가름하는 곳은 아니니까. 나는 잘 살고 싶다. 우리 엄마가 언제나 말하듯 잘 사는 것 어렵지 않은 것, 안다. 나는 어쩌면 가까운 길을 너무 길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1992년 초봄, 나는 울지 않는 순간들을 좋아해>
나는 할아버지를 사랑한다.